[정경화의 휴먼 에세이] (1) 떠나면 될까?

휴먼뉴스 | 기사입력 2019/08/27 [05:00]

[정경화의 휴먼 에세이] (1) 떠나면 될까?

휴먼뉴스 | 입력 : 2019/08/27 [05:00]

 

 
본지는 오늘부터 에세이스트 정경화의 [휴먼 에세이]를 매주 2편씩 연재합니다. 
[휴먼에세이]는 필자가 평소에 경험한 삶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전해주는 라이프기록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 필자 정경화    



떠나면 될까?
 
경복궁역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린다. 여행 가방을 끌고 한 곳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외국인, 해외로 떠나는 내국인 등이 뒤섞여 있다.

가을 햇살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선글라스를 미리 꺼내 놓았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최대한 태양을 피해본다.

보라색 낡은 내 여행 트렁크에는 스티커가 제법 붙어있다. 떼어내려고 하다 강력한 접착제 저항에 처참하게 뜯겨 반만 남은 것도 있다. 이번에는 독일로 간다. 왜 가느냐고? 사실 이유는 없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다. 비록 가진 돈은 없지만 작가 흉내를 내고 싶은 거다. 비싼 돈 들여 독일까지 갈 필요가 있냐고 놀려대는 주변사람들의 말 공격에 기세가 한풀 꺾이기도 했지만, 그건 내 마음이다. 독일을 가든 프랑스를 가든 아니면 뒷산에 올라가든 특별한 이유는 나로부터 나온다.

난, 따끈따끈한 에세이스트 신인작가다. 원래 초보자는 요란스럽다. 이런 요란스러움이 선배작가들 눈엔 웃겨 보일 거야. 먼 훗날, 모르긴 해도 오늘을 회상하며 나도 웃게 되겠지.

항공료를 아껴보려고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아에로플로트 러시아 항공편을 예약했다. 우주선까지 띄운 러시아니까 무사히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줄 것으로 믿는다.

이윽고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솜틀에서 막 털려나온 솜처럼 몽실몽실한 하얀 구름을 뚫고 날아올랐다. 구름과 하늘의 경계. 수평선도 아니고 지평선도 아닌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구름이 저렇게 허공에 누워있으면서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게 신비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지금 탈출하는 중이다. 허무로부터 패배로부터 무의미로부터 그리고 묵은 찌꺼기로부터 나는 도망치는 중이다. 열정을 다했던 시간의 결과는 허무하다.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시작도 끝도 잘 모르겠다. 잘 몰랐으니까 이 지경까지 왔겠지. 입버릇처럼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내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쉼 없이 뛰었다. 기죽지 않으려고 애도 많이 썼었다. 여기도 박사, 저기도 박사 죄다 전문가뿐이었다. 내 타이틀은 사무국장인데 아는 것이 없었다.

입사 초, 어떤 회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대표를 바꿔달라고 했다. 대표님은 해외 출장 중인데 누구신지 알려주면 전해드리겠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내 직함대로 사무국장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니가 뭔데 감히 누군지 알려고 하냐’며 상소리를 했다. 낮은 소리로 되물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대표님 해외 나가 계신다는데 화내시는 이유가 뭐죠”
“니가 뭐야? 새로 왔어”
나는 내 이름을 밝히고 그의 이름을 알아낸 다음 전화를 끊어버렸다. 벨이 다시 울려도 받지 않았다. 부르르 떨리는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다. 이런 대접은 아직 받아보질 않았었다. 초라해진 내 영혼. 따귀라도 맞은 듯 얼얼하다.
그래, 여기서 그만두자.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보다. 이곳 아니어도 내가 기댈 언덕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해외에 있는 대표에게 카톡문자를 보내고 답을 기다렸다. 대표의 답장은 뜻밖이었다. 그런 인간은 회원명단에서 지우고 회비도 돌려주겠다고, 오히려 그런 일을 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커다란 감동이 밀려왔다.

대표는 각진 얼굴선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가시덤불 정원이 떠올랐었다.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가지를 잘라주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뽑아 쉴 틈을 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예상 밖의 용단을 내리는 것에 감탄하면서 같이 가기로 마음먹었다. 여기라면 내 마지 막 직장으로 혼을 불살라도 되겠다. 단체가 크고 작고가 무슨 문제냐, 어떤 사람과 함께 걷는지가 중요하지 했었다.

좋게 보자고 들면 한없이 좋은가보다. 모든 것이 좋았다. 찾아오는 회원들도 하는 일도 다 좋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조찬포럼도 피곤한 줄 몰랐다. 밤새워 준비해도 거뜬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웃는 낯으로 회원들을 맞이했다. 내게 돌아오는 사랑은 두 배가 되었고 나만의 영역이 만들어졌다. 학술세미나에서 귀동냥한 것이 보이지 않는 재산으로 불어났다. 궁금하면 책을 꺼내 읽고 뉴스를 보고 전문가들 글을 찾아 읽었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북한이 어떤 곳인지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안목이 조금씩 열렸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 바라본 남북관계를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자 많은 전문가들이 미심쩍어 했다. 한 번 쓰고 말겠지 하는 것 같았고 어떤 분은 대놓고 누가 도와준 거냐고 묻기도 했다. 오기가 생겨서 더 많은 자료를 찾아 읽으며 지식을 충전해갔다. 전문가들과 만나는 자리는 빈번했고 나는 그때마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물어보았다. 작은 변화가 일었다. 조금씩 전문가들 마음 문이 열리고 기꺼이 나를 후보 선수 벤치에 앉혀주었다. 물론 내 글을 못마땅해 하는 분도 있었다. 기독교 대북선교 부분에 대해 우려의 글을 썼을 때 기독교 신자인 모 교수님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 또한 기쁜 일이었다. 거론할 가치도 없는 글이었다면 반박 의견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땐 참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신명나게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믿음은 무너졌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대표는 내게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꾸짖었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늘고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대표와 나 사이는 멀어졌다. 결국 큰일을 앞두고 나와 대표는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한 방에 허물어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서로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린 것이다.

후회는 부질없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적어도 마무리는 멋지게 하고 싶다. 그렇다고 되돌아온 길을 다시 가고 싶진 않다. 일하던 곳을 떠나온 지금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허기가 진다. 그래서 떠날 수밖에 없다. 일그러진 모든 것들로부터 나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떠난다.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듯 마는 듯 떠있다. 이전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러 가는 거다. 독일은 나의 새로운 탄생지가 될 것이다. 그래, 떠나고 내려놓고 버리고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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